장보고를 읽고
장보고는 신라 사람으로, 서남해안의 해적을 평정하고 청해진을 설치하여 당나라와 일본을 상대로 해상무역을 주도한 위인이다. 장보고는 중국과 일본 역사서에 더 상세히 소개될 만큼 국제적으로 영향력이 큰 인물이다. 이의 다른 이름은 궁복이며, 삼국유사에는 궁파로 기록되어 있다.
바다의 신 "해신"으로 불리는 장보고는 어부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고기잡이를 하며 생계를 유지해나갔다. 그는 여려서부터 무예가 출중하고 용감하였다. 수군 대장이 되는 게 꿈이었지만 당시 통일 신라는 엄격한 골품제도가 있는 신분제 사회여서 불행히도 장보고는 벼슬을 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그는 벼슬을 하기 위해 당나라로 떠나게 됐다.
그는 여러 면으로 뛰어나서 당나라 무령군 소장이 되어, 그곳에서 군대의 선봉을 맡아 큰 공을 세우며 살아갔다. 그러나 당은 계속된 전쟁으로 많은 전비를 사용하여 재정이 궁핍해져서 재정적 압박이 갈수록 심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보고는 신라사람이 해적들에 의해서 노예로 팔려가는 모습을 보며 화가 많이 나서 신라로 돌아왔다.
그 후 신라로 귀국한 그는 신라의 왕을 알현하여 신라왕께 아뢰기를 “당나라에서 신라인이 노예로 팔리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에게 1만의 병력을 주신다면 해적을 소탕하여 이러한 일이 생기지 않게 하겠습니다.”라고 왕께 아뢰니 신라왕은 흔쾌히 허락하여 그에게 1만의 병력을 주고 청해진을 설치하도록 한다.
그 후 장보고는 완도에 청해진은 설치하게 된다. 청해진이 훌륭함은 조선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충무공 이순신 장군께서도 감탄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청해진은 신라 장보고가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에 설치한 해군 무역 기지를 말한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그 첫 번째는 바로 해적 소탕이다.
옛 서적에 따르면 실제로 그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한 후 해적들이 많이 사라졌으며, 해상에서 신라 사람을 파는 자가 없어졌다고 한다. 두 번째 이유는 해상무역에 있다. 통일 신라의 지리적 위치는 일본과 중국의 사이에 있어서 일본과 중국을 잇는 중개 무역을 하기엔 매우 유리한 조건이다.
일본이 중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신라를 거치지 않고서는 갈 수가 없었으며 중국 또한 상황은 같았으므로 신라의 지리적 위치를 특히 청해진의 우치를 무시할 수 없었다.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한 이후 당과의 무역이 엄청난 규모로 성장하였다. 이후 신라는 156년 동안 무려 23회에 걸친 왕위 쟁탈전이 벌어졌으며, 839년 문성왕이 왕위에 올랐다. 845년 장보고는 문성왕의 둘째 왕비로 자신의 딸을 보내려 하였으나 중앙의 귀족들이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반기를 들었으나, 846년 문성왕이 보낸 염장이라는 자객에게 살해를 당하고 만다.
삼국유사에는 문성왕의 아버지인 신무왕과 약속했고 이를 어기자 장보고가 왕을 원망하여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장보고는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많은 일들을 했지만, 안타깝게 권력 다툼에 휘말려 목숨을 잃게 된 점이 아쉽다. 하지만 당나라에서의 직위를 버리고선 신라로 돌아와 노예로 팔려가는 사람들을 보호하는 등 나라에 큰 업적을 이룬 장보고가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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