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약용을 읽고
오늘도 사람들은 신문과 뉴스를 보며 한숨을 쉰다. 부정부패한 정치인들 바라볼 때면 나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다산 정약용을 은근슬쩍 떠올려 서로 비교해본다. 정약용은 학문을 출세 수단이 아닌, 백성들의 삶을 복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민심을 헤아릴 줄 알고, 항상 청렴결백한 위인이었다.
정약용의 위인전을 읽으면서 페이지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그에게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약용은 영조 38년에 경기도 남양주시 마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장재원은 진주 목사를 지냈으며 어머니는 해남 윤 씨의 고산 윤선도의 후손이다. 정약용의 집안은 8대 연속 홍문관 학사를 배출한 적이 있는 집안이었고, 외가는 학문과 예술의 집안이었다. 그의 형제들은 학문적 재주가 있어 실학과 서학에 일찍 눈을 떴으나 꽉 막힌 시대에 희생되고 말았다.
정약용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썼다. 9세 때에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그는 아버지 밑에서 세 형과 함께 글공부를 하였으며 14세 되던 해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오고 나서 이가환 이승훈 등의 친구들을 사귀면서 이익의 학문에 눈이 띄게 되었고 정약용은 이때부터 학자가 될 것을 다짐하였다. 정약용은 22세에 성균관에 들어가 정조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
정약용은 또한 28세에 대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학문과 행정에서 정조의 신임을 얻으며 측근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이때 처음으로 천주교를 접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규장각 초계문신으로서의 활동, 수원화성의 설계, 암행어사로서의 활약 등으로 장차 정조가 중용할 것이 예상되었으나 정적들은 다산의 성장과 그에 대한 정조의 총애에 위기감을 느껴 천주교를 빌미로 그를 제거하려고 했다.
정약용은 정조가 죽자 정적들에 의해 사지에 내몰렸고. 결국 그는 겨우 목숨을 건져 18년간의 긴 유배생활에 들어갔다. 정약용은 자신의 운명에 결코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아픔을 학문적 업적으로 승화시켰으며 경학과 경세학 등 여러 방면의 학문연구에 힘써서 목민 심사, 흠흠신서, 경세유표, 매씨상 서평 등 500권 이상의 책을 저술하게 된다.
그는 18년의 귀양살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18년을 살며 자신의 저술을 수정하고 보완해 자찬묘지명을 지어 자신의 삶을 정리했다. 39세에서 56세까지의 유배생활은 정양용의 인생에서 가장 험난하고 참담했던 세월이었으나, 그는 오히려 이 시기를 참고 또 참으며 자시의 학문을 돌아보며 완성하는 계기로 삼았다. 나도 이런 계기를 본받아야 하는데 이런 시련들이 일어나면 항상 좌절을 하게 되는지 모를 일이다.
정약용은 철학, 윤리, 종교, 정치, 경제, 과학, 문학, 언어, 의학 등등 모든 부문에서 높은 수준의 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희생해가며 토지의 불균등한 소요와 토지가 대지주들에게 많은 양의로 집중되어 있는 것을 비판하여 토지의 공동소유와 공동 경작 그리고 균등한 분배를 주장하였다. 정약용은 유학에 대해 전면적으로 과학적인 실학사상을 전개하였으며 실학적인 일을 하면서도 그는 500여 권의 넘는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중 으뜸으로 치는 책으로는 농민 심서가 있다. 정약용은 올바른 역사와 인식으로 그 시대의 진정한 학자로서의 삶을 살았으며, 이것은 오늘날의 우리의 본이 되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하지는 않아 땅속의 조상들이 울 것이라고 생각을 하니 죄송스럽다. 그는 자신을 착하게 하고 남을 사랑하는 것이 공부의 목적이라고 말했으며 내가 생각하는 그의 최고의 말로는 “통치자는 백성을 위해 이는 것이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다 이 말은 백성을 지키고 자기는 낮은 자세를 하는 정약용이야 말로 이 시대의 참된 관리이다. 우리도 이러한 사상을 본받아 성실과 근면 실학사상을 본받아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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